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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난. 태조 7년 무인년 8월 25일 (1398)에 일어난 일로 이방원이 정도전 일파의 병권 집중과 세자 책봉에 반대하여 정도전 및 방석·방번 형제까지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는데 이것을 “제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제2차 왕자의난. 정종 2년,(1400)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을 품고 동생 방원을 질시하던 중, 1차 왕자의 난 때 논공행상 (방원의 편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일등 공신에 책봉되지 못한)에 불만을 품던 박포의 거짓 밀고를 믿고 군사를 일으켜 방원을 공격 방원의 승리로 끝나 방간은 유배를 가고 박포는 사형을 당했다. 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이 끝난 직후 세제가 되었다. 이것을 “제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왕자의난 개요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 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황표정사 와 계유정난

단종(1452~1455) 때 임금이 어렸기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의정부 대신들과 상의하여 황표하면, 임금이 형식적으로 이를 낙점하던 일. 이것을 “황표정사”라고 함 이 당시의 정치는 김종서 황보인 등 의정부 재상들에 의해 좌우되었고 그 결과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음.

 

계유정난

의정부 재상들이 정치 주도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왕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그는 권람 한명회 등과 모의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과 안평대군을 살해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를 1453년 계유년에 일어났다 하여 ‘계유정난’이라 한다

 

개요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나 몸이 약하였다. 그래서 였는지 그의 아들 문종역시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몸이 약하다는점을 꼭 빼닮았었다. 그런 문종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 하면서 김종서와 황보인을 불러 단종을 잘 부탁한다고 한다. 문종이 죽자 나이가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일어난다.

 

화석정

율곡 이이(1536∼1584)가 자주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조선 세종 25년(1443)에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처음 지었으며, 성종 9년(1478)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와 한국전쟁(1950)년 두 번에 걸쳐 소실되었으나 1966년 파주 유림이 다시 지었다.

 

마하연

표훈사에 딸린 암자로, 661년(신라 문무왕 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마하연'이란 대승이라는 뜻이다. 1831년(조선 순조31년) 고쳐지었고, 내금강 오지 교통의 요지였기도 하여, 금강산의 중심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곳을 경유해야만 주위의 다른 사찰로 갈 수 있었다.

 

반계 유형원

반계 유형원(1622~1673)은 조선중기 실학의 창시자,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총체적 제도개혁 주창, 실증과 현실문제를 중시하는 학풍조성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반계 유형원은 율곡 경장론에서 그 개혁론의 근거를 마련한다.

 

행주대첩

권율장군과 명군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합동작전을 펼친다. 그러나 벽제관에서 패한 명군은 평양으로 돌아가 움직이지 않는다. 행주산성에 고립된 권율은 관, 민, 군, 승려, 부녀자들을 동원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승리한다.

 

칠천량해전

고니시의 책략으로 이순신이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자 선조는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부산을 공격하라 명령한다. 이에 조선수군 출전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적의 유인전술에 휘말려 전멸하다시피 패전한다.

 

진종

영조 (1694~1776)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정빈이씨이고, 사도세자의 형이다. 1724년 영조즉위후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나 즉위하기전 10세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 즉위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파주이며, 시호는 효장이다.

 

임오화변

영조 38년 (1762) 영조의 아들 장헌세자가 뒤주에 가둬 굶겨 죽는 일이 일어난다. 이것을 “임오년에 일어난 화변이다“라 하여 임오화변이다. 당시 소론 쪽으로 기우는 장헌세자를 노론이 모함을 영조에게 말하여 일어난 일로, 후에 영조가 이 일을 크게 후회하여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융릉

영조 38년 1762년 5월 21일 사도세자가 죽은 후 배봉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어 있다가,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 추존 후, 융릉으로 승격시키고 1789(정조13년) 10월 7일 수원화성으로 이장하였고, 후에 현경황우 홍씨도 죽자 합장하였다.

 

홍재전서

조선후기 정조(1752~1800)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출판한 왕으로 정조가 쓴 수필, 시 등을 적은 책이다. 1799(정조 23년) 편집하기 시작하여 190편으로 정리하였으며, 그 문집이 홍재전서로 간행되었다.

 

 

존주론

“주나라를 존중해야한다“는 공자의 생각으로 주나라를 계승한 명나라가 망하면서 조선이 명을 뒤이어 주나라 정통성을 계승하는 국가라는 것으로 이전의 소중화의식에서 조선중화의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물성동론

조선후기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인간과 동물 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에대한 인물성 동이론중에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은 같다라는 이론이 인물성 동론이다.

 

초계문신

정조시대의 (재위1776-1800) 규장각에서는 1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일정기간 규장각에서 공부를 하도록 하는 문신 재교육 기능도 갖고 있었다.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시키는 현 공무원관리원역할을 하여 정조의 친위세력 형성에 중요한 몫을 하였고 조선전기의 사가독서제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장용영

1872년 훈련도감의 무예 출신 등 30명을 선발하여 명장전에 번을 세우던 것을 (정조9년) 1785년 정조의 경호부대로써 장용위로 칭하고 1793년 정조 17년에 장용위를 모태로 장용영으로 격상하면서 왕권강화의 핵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신해통공 청책

1791년(정조15년)에 각 시전의 국역을 존속시키면서 도가상업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난전권을 금지시킨 조치,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상품을 자유롭게 판매하면서 시전이외의 새로운 상권이 형성 되었음.

 

금난전권

조선후기 육의전과 시전상인이 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난전을 금지시킨 행위로, 조선후기에 확대된 상품화폐경제에 장애물이 되었고 사상고도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조선 조정은 18세기 말 통공발매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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