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950년 6월 25일 기습 선제 공격으로 남한을 침략한 전쟁.
전면 남침으로 6·25 전쟁을 일으켰으며, 정전 협정을 한 뒤에도 협정을 위반하고 계속해서 북한은 대남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1129일)간 교전이 이어졌으며, 현재까지 72년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역이용해, 극동아시아의 미소 냉전 사이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가 있어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한다.
6.25 전쟁 당시 호남 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 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8936명의 65%에 이른다.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내무부 통계국.
6·25 전쟁은 김일성의 강한 주도로 발발한 전쟁이며,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미국의 강력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어 직접 충돌을 꺼렸다. 그래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으나 국제정세에 문외한인 김일성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아 내고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은 미국과의 정면 충돌을 꺼렸으므로 자신을 대체할 북한의 지원국으로 중국을 골랐던 것이다. 중국도 소련이 미국과의 승부를 떠넘기려는 의도를 잘 알아 군수물자등 간접적인 지원만 했을 뿐 처음부터 참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군과의 충돌을 꺼리는 만큼 미국에 대한 경계심도 상당하여 저우언라이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38선을 넘어 북진하려는 미군에게 남한이면 몰라도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다면 참전할 것임을 시사했고 미군이 이를 무시하고 북진하자 대병력을 동원해 참전했다. 당시 스탈린은 영국인 첩자를 통해 미국의 핵능력을 잘 파악했고 늘 두려워했다.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도록 내버려두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지원 요구를 몇 차례 거절하였으나, 이후 생각을 바꿔서 중국의 지원약속을 받아낸다는 조건으로 남침에 동의했다.
이때 중국의 참전으로 미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는 후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 지역으로 진격하지 말라는 중국의 경고를 받아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6·25전쟁의 평화 협정(Peace treaty, 종전 협정 또는 강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아직도 진행 중인 전쟁이지만 현재 남북 양측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중이라는 인식은 드물다.
이는 법적으로는 평시(平時)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戰時)에 시행되는 비상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유례 없이 긴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 준전시(準戰時)라는 특수한 대치 상태로 구분된다.
한국 대법원의 판례는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으며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국회 또한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 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6·25 전쟁에서 각각 통일에 실패한 대한민국과 북한은 이후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걸고 체제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 운영과 국민 여론 및 국민의식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 전쟁으로 굳어진 각 체제(體制, Regime)는 유지되고 있다.
제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대만은 중국이 병력을 한반도로 투입하는 바람에 살아나게 된다.
반면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어 20년 넘게 외교적 고립을 면하지 못하는 등 현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 최대의 국제전쟁이다.
북한의 전쟁범죄
소위 인민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행위가 가장 유명하다. 각 점령지역의 주민을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입구등으로 소집해 모아놓고 자신들이 체포하거나 납치한 인물들을 형식적 재판이후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이때 처형당한 인물들은 기업인, 교육자 정치인, 대한민국 군경 및 공무원 가족 등 북한과 좌익세력에 의해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 함흥시 학살 사건 등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적 절차조차도 없이 자행한 학살들도 빈번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에 의해 개신교인 1,026명, 천주교인 119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손진태, 박열, 정인보, 이광수, 방응모 등 유명 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납북자의 88.2% (84,659명)가 한국 전쟁 발발 이후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되었으며, 그중 80.3% (77,056명)가 자택이나 자택 인근에서 납치되었다. 납북된 한국 인사 중에는 법조인이 190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언론인이 226명이었다. 또한 이러한 납치의 기획은 전쟁 중에뿐만 아니라 전쟁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생산된 북한 당국의 문서에서도 확인이 된다.
-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출처 -
그 외에 국군, 유엔군 포로에 대한 처우가 매우 처참했다. 전방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2~4주씩 걸어서 가깝게는 평안북도 멀리는 중국 만주지역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이때 부상을 입은 포로의 경우 들것 수송이 금지되어 걷지 못하면 길에 버려져 죽거나 사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포로들에 대한 배급 역시 열악하여 말린 채소 소량 혹은 부패한 생선 따위가 배급되었고 이마저도 이송시에는 제공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휴전 이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적대계층으로 차별받으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6.25 전쟁의 어록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인천 상륙작전은 5,000 대 1의 도박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확률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그들을 격멸할 것입니다."
"...Inchon is a 5000 to 1 gamble, but I am used to taking such odds... We shall land at Inchon and I shall crush them."
-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UN군 총사령관)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I cannot in good conscience return to Korea as a Christian missionary in peacetime if I am not first willing to be there to help the Koreans defend their freedom in time of war,”
-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본부중대 정보장교로 6.25 전쟁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에서 전사.)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 월튼 워커
"가거라!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 만약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짐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거라!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짐도,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 모른 척한다면,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
- 하일레 셀라시에
"대한민국은 미국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 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 해리 S. 트루먼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 일본 후세 다쓰지
"조선전쟁은 구제의 신이다!"
일본 도요타 에이지 전 토요타 회장의 회고록에서
"운 좋게 한국전쟁이 일어나 일본 경제 재건이 빨라졌다."
일본 아소 다로 전 총리, 재무대신.
"한국은 걱정마세요. 한국은 걱정마세요. 여기 영웅들이 모인 군대가 가고 있습니다."
"ስለ ኮሪያ አትጨነቅ... ስለ ኮሪያ አትጨነቅ... የጀግኖች ሰራዊት እዚህ አለ።"
- 에티오피아 제국 황실근위대 메할 세파리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프랑스 육군 중장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대한민국 백선엽 장군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
대한민국 2대 국방부장관 신성모
6.25전쟁의 영향에서 일본은 이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다.
6.25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국제적으로는 태평양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전후복구에 전념하던 일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에게 대량의 보급물자 생산 및 수송을 발주받은 덕에 불황을 조기에 벗어나 경제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소독약만 팔아서 떼부자된 사람들도 존재했을 정도다.
또 일본에서 차출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막기 위해 1954년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警察豫備隊)가 신설되었다. 처음부터 군대가 아니였고 이를 계승한 자위대는 지금도 형식상 군대가 아니다. 아예 한국전쟁 중에 미군은 구 일본군의 해군 조직 일부를 미군의 지휘 아래 참전시켰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고, 당시 미국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예 순한 양으로 개조하려던 계획을 완전히 리셋하고 공산권에 대응한 태평양 방파제로서 키우게 만든 전환점이 바로 이 전쟁이다.
물론 일본이라는 국가는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메이지 유신 이래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완성된 근대 국가였기에 한국전쟁이 없었다 해도 이미 자체적으로 전함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공업과 경제 수준은 아시아에서 최고였다.
패전으로 다 망한 일본이 6.25 전쟁 하나로 경제대국이 되었고, 심지어 6.25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경제대국 일본은 없다는 일부의 과격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6.25 전쟁이 아니었어도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세계 역사의 전면에 금방 모습을 드러낼 역량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열강이자 강대국이었다. 초부터 동아시아의 공산화방지 명목으로 경제, 기술 지원으로 최단기간동안 빠르게 복구시킬 의도도 있었지만 재건 자체는 시간문제로 경제대국으로 복귀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 정도를 최소 10년 이상 크게 앞당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사실 종전 후 일본이 다시금 잠정적 적대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의 공업력을 상당히 제한시켰고 상업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계약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군정령으로 발표된 '집단기업군 해체'였다.
오죽하면 1990년대 말,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불황이 크게 생기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이 다시 일어난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한겨레21 기자가 일본에서 들러 취재하다가 들른 술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일본 회사원들까지 보았다고 할 정도. 하지만, 일본 경제학자들은 그때와 다르기에 한반도에 전쟁이 나봐야 극히 일부만 이득을 보고 일본 전체적인 호황은 어렵고 되려 대포동 쇼크 이래로 이젠 탄도 미사일같은 걸 갖춘 북한이 전쟁 확대 및 마지막 도발로서 일본에 쏴대면 일본이 전쟁에 휘말려 크나큰 피해를 당할 가능성도 높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현재,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도 6.25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조선특수(朝鮮特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특수(朝鮮特需)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에서 전쟁 관련 물자를 구입하였는데, 이런 미군의 특수로 일본의 경제가 호황을 맞게 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일본경제기획청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일본이 조선특수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약 40억달러로 당시 일본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일본의 전쟁특수는 중공군 참전 덕을 톡톡히 보았는데, 중공의 참전이 없었다면 1950년에 1년도 안 끌고 끝났을 전쟁이 1953년까지 끌리게 됐다. 중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욕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욕망으로, 자기들 손으로 일본을 되살려놓은 셈이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마오쩌둥은 일본에게 "일본이 중화민국과 싸워서 힘을 빼준 덕분에 우리 공산당이 대륙을 먹을수 있었다. 고맙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패전으로 다 망한 일본이 6.25 전쟁때문에 경제대국이 되었고, 심지어 6.25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경제대국 일본은 없다는 일부의 과격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6.25 전쟁이 아니었어도 일본은 원래도 패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세계 역사의 전면에 금방 다시 모습을 드러낼 역량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다만, 6.25 전쟁이 크게 경제발전을 촉발시킨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이 6.25 전쟁에서 얻은 이득이 크지 않다는 수정주의적 이론이 있으나 6.25 전쟁에서 일본이 상당한 이득을 얻은 건 사실이다. 다만 이 이득이 완전히 무너졌던 일본을 살려냈냐와 조금씩 재건하며 성장하던 일본 경제의 기폭제가 되었냐로 일본 내에서 논쟁 중이다."
6.25 전쟁의 명칭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반면 이 전쟁은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발발한 날짜가 전쟁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관습적으로 날짜-사건을 조합해 6·25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방송공사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영어로는 The Korean War라고 부른다. The Forgotten War라고도 한다. Korean War라는 이름은 제1세계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 사령부에서 붙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명칭 외에도 6·25전쟁을 호칭하는 몇몇 어휘들이 있는데, 가령 북한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 초센센소), 조선동란(朝鮮動乱, 초센도란) 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한국(韓國)을 한반도 남반부의 국가(대한민국)에 한정된 의미로 보고 아직도 조선(朝鮮)을 '한반도' 혹은 '한민족'을 일컫는 말로 쓰기 때문에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쓴다.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전(韓戰)이라고 부른다. 대만에서는 베트남 전쟁도 월전(越戰)으로 부르고 있다. 다만 대만에서도 지명으로서는 조선(朝鮮)이 더 익숙하기에 민간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전협정 체결일인 7.27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이라고 포장하여 매년 열병식등의 행사를 주최하여 기념하고있다. 당시 북한에서는 남측을 미국의 괴뢰정권, 미국의 하수인들이 지배하는 악의소굴, 미군정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침략당한 영토라는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에 남쪽에 잔존하는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국의 남반부를 해방시키자는 의미에서 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다닌다.
한편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표현은 보통 '만력조선지역'이지만,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战争)이라고도 한다. 이는 왜적에 대항해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6·25를 의미하는 항미원조와 대상만 다르다.
The attack upon Korea makes it plain beyond all doubt that communism has passed beyond the use of subversion to conquer independent nations and will now use armed invasion and war. It has defied the orders of the Security Council of the United Nations issued to preserv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 know that all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will consider carefully the consequences of this latest aggression in Korea in defiance of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A return to the rule of force in international affairs would have far-reaching effects. The United States will continue to uphold the rule of law.
대한민국에 대한 이러한 공격(북한의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체제전복이라는 수단을 넘어 이제는 무장침략과 전쟁을 사용할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국제평화와 안보를 지키기 위한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또한 무시하였습니다.
(중략)
저는 UN에 소속된 모든 국가들이 유엔헌장을 무시한 채 한국에 대한 침략의 결과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라 봅니다. 국제관계에서 힘에의한 통치로의 복귀는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치를 지킬 것입니다.
해리 S. 트루먼. 1950년 6월 27일 연설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