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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대륙상나라
고리국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동예 (일부지역 고구려에게 병합)
-옥저 (고구려에게 멸망)
백제 -동예 (일부지역 신라에게 병합)
-가야 (신라에 병합)
-탐라국 (신라에 항복 후 신라속국이 됨)
발해 통일신라
후고구려
(마진 태봉 포함)
후백제 신라
금나라
(신라혈족)
고려
고려 원나라 식민지
(원 간섭기는 중화적 표현)
  조선
(명나라 &청나라 사대 및 사실상 식민지)
※대한제국 역사 포함
 청나라
(금나라 계승)
  일본제국 식민지
미군정 통치
대한민국
(북한 지역 포함)

 

1. 고조선은 갑골문자를 사용하던 황하문명의 상나라로 부터 출발한것으로 보인다.

애초 문명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갑자기 발생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러 기록을 대조해보면 결국 고조선 지역에 있던 해당 지역에 토템사상을 믿는 부락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기자가 고조선 땅에 오고나서부터 문명을 수용하고 국가로 발돋움 한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결코 중국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대륙에서 넘어온 문명이며 대부분 고서에서 한반도의 지도계층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배운 고조선의 8조법이 기자로 부터 출발함을 요사에서는 밝히고 있고,

삼국유사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중국에서 넘어온 기자의 고조선을 계승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기자(箕子) 8조의 가르침이 풍속으로 남아 있다.
《요사》 中

당고(唐高) 즉위 50년 경인(庚寅)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또는 궁홀산(弓忽山)이나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림이 1,500년이었다. 주(周) 호왕(虎王: 주무왕) 즉위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다.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조선)- 中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고려사》 <세가> 문종 9년(1055) 을미년 가을 7월

서적을 상고해 보면, 본래 기자가 봉 받았던 땅으로, 9주의 교화와 8조의 가르침이 사람에게 깊이 배어 1,000여 년이 지났으니, 실제로 우리 동방 풍속의 시작이 되었다. 
《동문선》, 제93권, 하륜, 서북면 도순문겸 병마도절제사 평양윤

조선은 바로 인현(仁賢)한 기자(箕子)의 후예로서 하늘의 돌봄이 독후(篤厚)하여 한 무제와 당 태종(唐太宗)도 멸할 수 없었던 나라이다.
-명나라 병부(兵部)(《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1월 1일 정사 1번째 기사 1592년)

단군은 하나라 우왕을 거쳐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응제시주》 中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이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이 확립되었으며, 제15대 숙종 때 기자 사당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2. 고조선은 한반도와 중국지역의 걸쳐있는 국가였고, 멸망은 중국으로 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한반도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어려워 보인다. 고조선 자체를 보면 중국과 한국의 공유하는 역사로 보인다.

 

3. 부여는 고조선과 별개의 국가로 동일선상에 연결되는 국가가 아니며 부여가 고조선을 딱히 계승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온 국가라고 역사서에 등장하니, 부여가 이 둘의 부모가 되는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4. 다만 백제 건국에 있어서 문헌 상으로는 백제와 부여의 관계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백제와 부여의 관계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부여 -> 고구려 -> 백제로 부여의 정신이 이어받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백제는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에서부터 부여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학계의 다수 의견이다.

신라는 부여로부터 큰 영향은 없어 보인다. 

 

5. 마한/진한/변한은 국가로 보기에는 힘들고 여러가지 부족 집단적 성격이 있으니, 이것은 국가역사로 넣지 않음. 물론 이들의 지역에서 백제와 가야, 신라가 등장하는 발판이 됨.

옥저의 멸망은 문헌상 찾아볼 수 있다.

동예의 일부지역은 신라로 병합되고, 일부지역은 고구려로 병합된다.

동예가 멸망한 이유에대해서는 문헌에 찾아 볼 수 없고 추측 밖에 없다. 애초 부락에 가까운 것이라 지금 기준으로 국가로 보기도 어렵기 떄문이다. 

 

6. 신라는 고구려에게 식민지배를 당한 것으로 보임.

5세기 중반까지 신라에 주둔하는 모습이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를 참고하면

광개토 대왕시절 당시 신라는 왜의 공격에 신라군이 자체적으로 진압하지 못해 고구려 군의 도움으로 막아내었다.  왜구가 토벌되고도 고구려 군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계속 주둔하여 있다는 대목이 나오고, 주둔중의 보급은 신라에서 충당하니 이는 신라 내부 정치를 할때 당시 고구려 장군의 입김이 들어감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고구려군의 신라 주둔으로 신라의 차기왕까지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로 신라조정에 영향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기록상 신라왕사를 살펴보면 된다.

신라왕들 중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시대 내물왕 다음의 왕이 조카인 실성왕으로 옹립된다.

상당히 특이 케이스인데 내물 마립간에게는 눌지, 복호, 미사흔 등 적합한 왕자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물 마립간 사후 신라의 왕위는 실성이 차지한다.

실성은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할때 동맹의 볼모로 392년 보내져 고구려에서 약 10년간 생활하다가 401년에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내물왕 사후에 신라의 왕좌는 내물왕의 왕자들이 아닌 고구려에 인맥이 있고 후원을 받는 조카 실성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번 한번만 왕권에 개입한것이 아니였다.

실성왕이 신라왕으로 올라갔으나 실성왕은 전왕인 내물왕의 장남 눌지가 걱정되었다. 전왕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자신의 정치적 입김이 국가 운영에 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실성왕은 이전 왕의 장남 눌지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군에서 암살직전 눌지의 편에 서서 도와줌으로 오히려 역으로 실성왕이 암살당하고, 전왕의 장남 눌지가 왕으로 올라선다.

이것이 신라 눌지왕이다.

 

한국의 기록상 눌지가 실성왕을 죽인것은 교차검증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고구려군이 신라 도성에 당연히 주둔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눌지가 스스로 실성 마립간을 죽이고 임금이 됐다고 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군이 눌지를 임금으로 앉혔다고 되어있다.

 

실성 마립간은 친고구려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에 의해 숙청 당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실성 마립간보다 눌지의 정치적 가치를 더 높게 쳤기 때문이라는 설이 중론이다.

또한 실성왕 재임기간에  415년 혈성 벌판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해석도 있다.

 

눌지 입장에서도 자신은 전왕의 장남인데도 왕위를 받지 못했고, 자기가 앉아야할 왕좌에 올라간 삼촌 실성왕은 권력 강화를 위해 눌지의 동생 복호를 고구려의 인질로 보내고, 또 다른 동생을 미사흔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서 혈연관계를 갈기갈기 찢었고 전왕의 핏줄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이러한 실성왕의 행동은 눌지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눌지는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자 자신의 동생을 다시 신라로 조속히 돌아오게 한다.

 

7.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만주에서 금나라가 탄생하게 된다. 이 금나라는 신라인이 건설한 것인지 고려인이 건설한 것인지 이견이 갈리나, 한반도 출신 인물이라는 여러 기록이 남아 있어, 그 금나라 왕족의 뿌리는 한반도인의 역사일 수 있다. 이는 여러 역사서에 대해 교차검증을 통해 알 수 있다.

 

금나라의 시조가 한반도 출신이라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명시된 내용이므로 이 기록들이 거짓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 시기 서적 《만주원류고》에선 금나라의 '금'이 신라 김씨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다.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송막기문》

 

금(金)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며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여 살이었다...(후략)
《금사》 권1 본기1 <세기>(世紀)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 만주어: 하푸) 또는 함보(函普)는 원래 고려에서 왔다.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는 본래 신라로 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데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 나라가 종종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래 금나라의 황족들은 신라에서 와서 그 성이 완안씨이고 신라 왕성인 김씨 또한 이미 수십세에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흠정만주원류고》卷7 <部族 完顔>

 

 

또한 금나라인들에 대한 역사서도 존재한다.

《금사(金史)》 고려전에 대놓고 "금인은 고려의 말갈에서 떨어져나온 것에 기원한다.'라고 기록되었으며,[실제로 금나라를 건국하기 전의 여진족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이자 상국(上國)으로 섬겨 왔다.

 

우리는 금나라에 대해서 많이 배척하고 중국문화라고 생각하지만 지역적으로는 옛 부여와 고구려의 지역, 발해지역에 분포했으며,지리적으로 크게 멀지 않고 그 왕족의 뿌리와 백성이 스스로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서술되어 있기에 한국사가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

말갈족도 고구려와 발해의 백성의 일부분임은 당연하다.

 

신라는 이미 페르시아와 실크로드를 통해 다양한 민족과 연결되어있었고, 고려시대에 무역의 정점을 찍어 지금의 KOREA의 영어 어원이 된다.  동북 아시아 역시 예전부터 다문화 사회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엄청난 쇄국의 길로 가게되고, 하나의 민족이라는 단일민족성을 강하게 띄게 되지만, 이전 고려시대까지만해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없고, 성문화도 매우 개방적이였다. 그 이전 신라는 여성이 여왕이 되는 열린 사회였다.

 

만주가 우리 땅이였던 사실을 잊지않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것 처럼, 우리의 사상을 굳이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6. 지금의 제주도 탐라국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탐라국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8. 고려는 출발은 자주적이였으나, 이후 몽골에 뼈아픈 패배를 맛보고, 그대로 후에 몽골의 원나라 식민지가 된다. 원 간섭기니 뭐니 하지만 식민지와 다름없다.

 

 

9. 조선의 시작부터 조선이 끝을 달리는 그날까지 명나라 식민지 사대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명나라에서 출발해서 명나라가 멸망 이후 조선의 주인이 청나라로 바뀐다. 조선은 근처 강한국가에 자신의 국가의 자율성을 포기하고 강한 국가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사상을 지니고 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이라는 국명 변경이 있었지만 마치 태봉이 마진이되었다가 고려가 되었던거처럼 그저 이름 장난에 불과하다.  

조선의 고종에서 대한제국 태황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고종을 말할때 태황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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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끝으로

한국의 역사가 고조선을 기점으로 5000년의 반만년 문명의 역사는 아닌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5000년 역사의 반토막인 대략 240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고조선 건국시기 년도 역사정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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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역사-고조선의 건국시기 논란] 한국은 5000년 역사는 거짓이다. 대략 2500년의 역사로 유추

한국의 역사가 고조선을 기점으로 5000년의 반만년 문명의 역사는 아닌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5000년 역사의 반토막인 대략 240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선 요약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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